의(義) = 金 = 서쪽. 서울 4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성문

돈의문(서대문)

敦義門(西大門)

의(義) = 金 = 서쪽. 서울 4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돈의문의 풍수적 의미

돈의문(敦義門)은 서울 4대문 중 서쪽 문입니다. 의(義) = 金 = 서쪽으로, 유교 오상과 오행이 일치합니다.

안타깝게도 서울 4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 으로, 1915년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습니다. 현재 돈의문 터는 중구 정동 사거리(경향신문 사옥 앞) 인근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돈의문의 파란만장한 역사

돈의문은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세 번의 건설

1396년 한양 2차 성곽공사 때 처음 세워진 돈의문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 최양선이 "풍수적으로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새로 세운 서전문(西箭門)은 권신 이숙번의 횡포로 위치가 뒤틀렸습니다. 이숙번은 자기 집 앞이 시끄러워진다는 이유로 상왕 정종의 인덕궁 앞으로 문을 옮기게 만들었고, 이 일로 태종의 눈밖에 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세종 4년(1422) 서전문을 허물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세운 문이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입니다. 백성들은 이를 "새문"이라 불렀고, 이것이 새문안길(신문로), 새문안교회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풍수적 이유로 단층 건축

돈의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단층 누각 이었습니다. 숙종 37년(1711) 재건 시 단층으로 지은 이유는 풍수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동쪽의 낙산은 작은 반면 서쪽의 주산인 인왕산이 너무 컸기에, 동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쪽 문을 낮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동대문(흥인지문)은 낙산의 약한 기세를 보완하기 위해 크게 짓고 옹성까지 만든 것과 대비됩니다.

영조의 폐쇄와 재개방

1736년 영조는 돈의문이 경덕궁(경희궁)에 가까워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폐쇄했습니다. 수도 서쪽의 핵심 통로가 "궁궐이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7년간 닫혔다가, 1744년에야 재개방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한 철거

1915년 일제는 전차 궤도 복선화를 위해 돈의문을 철거했습니다.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살려두고, 돈의문만 허물었습니다. 조선 초부터 약 500년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복원 계획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이 발견되었으며, 서울시는 2035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다만 새문안로의 교통 문제가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권력과 풍수가 얽힌 문

돈의문은 서울 4대문 중 가장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문입니다. 풍수가의 진언으로 폐쇄되고, 권신의 횡포로 위치가 바뀌고, 왕의 안락을 위해 닫히고, 식민지배자에 의해 허물어졌습니다. 의(義)의 金 기운을 품은 문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역설적입니다.

위치

참고 자료

자주 묻는 질문

돈의문은 왜 금(金) 오행인가요?

돈의문의 '의(義)'는 유교 오상 중 금(金)에 해당하며, 서쪽 방위도 금(金)입니다. 의(義)는 정의·결단·엄격함을 상징하는 금(金)의 덕목입니다.

돈의문이 단층 누각이었던 이유는?

서쪽 주산인 인왕산이 동쪽 낙산보다 훨씬 커서, 동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쪽 문을 낮게 지었습니다. 반대로 동대문은 낙산의 약한 기세를 보완하기 위해 크게 짓고 옹성까지 만들었습니다.

돈의문은 왜 현존하지 않나요?

1915년 일제가 전차 궤도 복선화를 위해 철거했습니다. 서울 4대문 중 유일하게 사라진 문으로, 서울시는 2035년까지 복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돈의문이 풍수적 이유로 폐쇄된 적이 있나요?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 최양선이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원래 위치의 돈의문이 폐쇄되었습니다. 이후 세종 4년(1422)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세운 문이 우리가 아는 돈의문이며, 백성들은 이를 '새문'이라 불렀습니다.

돈의문이 '새문안길'의 유래가 된 이유는?

세종이 기존 서전문을 허물고 새로 세운 문이라 백성들이 '새문'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새문안길(신문로)과 새문안교회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전 문은 권신 이숙번의 횡포로 위치가 뒤틀리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습니다.

영조가 돈의문을 폐쇄한 이유는?

1736년 영조는 돈의문이 경덕궁(경희궁)에 가까워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폐쇄했습니다. 수도 서쪽의 핵심 통로가 7년간 닫혔다가 1744년에야 재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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